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제프 멩겔레 (문단 편집) === 전후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4975be331ddf4d041c621d9a12af26a7.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WP_Josef_Mengele_1956.jpg|width=100%]]}}} || ||<-2><#ddd> '''{{{#003153 전후 1956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신분확인서의 멩겔레 증명 사진}}}''' || 전후에 [[뉘른베르크 의사 재판|카를 브란트나 카를 게브하르트 등은 신나게 두들겨 맞고 교수형으로 처형되었지만]] 멩겔레는 달랐다. 그는 비슷한 케이스에 속하는 [[일본군]] [[731 부대]]의 [[이시이 시로]]와 달리 전범으로 낙인찍혀 공공의 표적이 되었으나, 결국 [[나치의 남미 도주|남미로 도주하여]] 수십 년간 가짜 이름으로 숨어 살았다. 바이에른에서 4년간 농부 행세를 하며 숨어지낸 뒤, 무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도망을 쳐서 남아메리카에서 편안하게 잘 먹고 잘살았다. 놀랍게도 재혼까지 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멩겔레는 아우슈비츠를 SS가 버릴 때 함께 떠나서 이쪽 저쪽 캠프를 돌아다니다 미군에 잡혀 포로가 된 적이 있었다. 그때 자기 이름 대고 들어간 데다가 강력 전범 체포 리스트에도 이름도 올라와있었던 상황이라서 미군에서 주의를 기울여서 붙잡아야 했지만, 안타깝게도 멩겔레가 있었던 캠프 두군데에는 멩겔레가 풀려나기 전까지 그의 이름이 올라온 리스트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또한 멩겔레는 다른 SS와 달리 문신을 하지 않았고, 교활하게도 아우슈비츠를 나온 후 6주간 [[독일 육군(나치 독일)|육군]] 병원으로 들어가 잠시 [[육군]] 군의관 행세를 했기 때문에 의심의 눈초리를 피할 수 있었다. 이 사실이 알려진 후 미 법무부 OSI는 1950년에 멩겔레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가명을 바탕으로 독일 내에서 수색을 시도했으나, 멩겔레와 같이 일했던 프릿츠 울만(Fritz Ulmann) 박사를 대신 찾아가는 삽질을 한다.[* [[https://www.justice.gov/sites/default/files/criminal-hrsp/legacy/2011/02/04/10-01-92mengele-rpt.pdf|In the Matter of Josef Mengele: A Report to the Attorney General of the United States]], [[미합중국 법무부|U.S. Department of Justice]], Oct. 1992, p.35-53.][* 해당 보고서를 받는 인물은 당시 법무부 차관보였던 [[로버트 뮬러]]이다.] 이후 [[남미]] 국가인 [[아르헨티나]]로 도망을 갔고 거기서 도망쳐온 많은 나치당원들과 만나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도망다니고 있을 때 [[아돌프 아이히만]]을 실제로 만난 적도 있다. 그러나 멩겔레는 아돌프 아이히만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며, 서로 서먹서먹한 사이였고 아이히만을 "목적이 없는 사람 같았다"고 평가했다.[* 끝까지 친분으로 지냈다면 모사드가 아이히만을 납치할 때 덤탱이로 멩겔레도 납치되었을 것이다.] 증언에 의하면 도망다니는 와중에 유럽에서 자신을 비난하고 자신의 악행을 드러내는 잡지가 나오자 그 잡지를 팽개치며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화를 내기도 했다. 그리고 멩겔레는 한때 [[파라과이]]로 도피한 적도 있었는데, 멩겔레가 당시 파라과이의 독재자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에게 [[나병]] 치료법을 알려줬다는 소문도 있다.[*열람주의 그 나병 치료법이라는 게 바로 '''[[바토리 에르제베트|어린이들의 피로 목욕하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스트로에스네르는 10대 초중반밖에 안 된 어린 소녀들을 납치해 [[성노예]]로 삼은 [[페도필리아]]이자 희대의 [[아동 성폭행]]범이었다.] 가족들 또한 멩겔레의 행위에 대해 전혀 반성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멩겔레가 유럽을 탈출하여 남미로 탈출하고 새로운 삶을 꾸리는데 필요한 자금은 농기구 생산 기업을 운영하는 재력가였던 친가의 뒷받침을 통해 마련되었고, 종종 가족이나 기업측 인사가 남미로 그를 방문하러 가기도 하였다.[* Ibid., p.143-144] 대담하게도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만나기 위해 유럽으로 여행을 가기도 했으며 자신의 아들인 이른바 롤프 멩겔레를 남미로 불러서 같이 사진을 찍기까지 했다. 또한 자신의 옛날에 결혼했던 아내의 장인과 자신의 아버지에게는 자신의 생존사실을 철저히 숨기게 했다. 또한 아들과 아내를 비롯한 사람들한테 편지를 보내기도 했는데 1976년 2월 한 친구에 보낸 편지에서 "내일 오전 일찍 (정원사인) 루이스가 올 것이며, 우리는 곧바로 정원 손질에 나설 것"이라고 쓰는 등 일상 생활만 늘어놓았을 뿐 과거 행위에 대한 반성은 없었다, 또한 "1주일에 1-2번 나는 편지를 부치고 전기요금을 내고, 독일식 빵집에서 빵을 사먹기 위해 마을로 나간다. 이것이 내가 즐기는 작은 기쁨들"이라는 편지도 있으며 또 다른 편지에는 "이따금 그녀는 내가 아침을 준비한 뒤에야 나타나거나 아예 오지 않기도 한다"고 쓰는 등 게으름을 피우는 브라질 출신 가정부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다고, 또 마지막 순간까지 독일 민족의 우월성을 믿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찬양하기도 했다고 브라질의 한 신문이 앞서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80년대에 슬슬 신원이 밝혀져서 이스라엘과 서방의 추적이 시작되었는데 정확히는 그의 생존 사실을 알고 있던 아내와 그의 가족들이 이 사실을 증언하면서 알려졌다. 그리고 증언을 바탕으로 멩겔레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는데 이미 멩겔레는 브라질 상파울루 바닷가에서 수영하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한 상태였다. 1976년부터 뇌졸중과 여러 병에 시달리던 멩겔레는 밝혀진 바에 따르면 1979년에 물에서 수영을 하다 심장마비가 일어나 익사했다고 한다. 하지만 미 법무부, 독일과 이스라엘이 멩겔레를 연행하려는 시도는 1985년에야 시작되었다.[* Ibid., p.137] 말년에는 자신이 붙잡혀서 아이히만처럼 교수형에 처해질 것을 무서워해서 집 주변에서 소리가 나면 깜짝 놀라 밖을 내다보았으며, 불면증에 시달리는 등의 불안 증세를 겪었다고 한다.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서 모사드 요원들에게 들켜 불법 납치를 당해 이스라엘에서 교수형을 당한 사건이 그에게 공포를 일으켰다. 까딱 잘못했다가 자신도 쥐도새도 모르게 교수대로 올라갈지도 모르니.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i.dailymail.co.uk/article-1126504-004C2AE800000258-460_233x375.jpg|width=100%]]}}} || ||<#ddd> '''사망하기 2년 전 사진''' || 사후에도 멩겔레가 어디에 있었는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1985년에 발견된 브라질의 어느 무덤의 주인이 멩겔레라는 게 알려졌고 한국의 소년잡지에까지 기사가 실릴 정도로 소문이 무성했다. [[http://cabinetmagazine.org/issues/43/mengele02_final2.jpg|1985년 유골 발견 당시 사진]] 과학의 발달로 무덤 속에 남겨진 이빨을 통한 DNA 검사로 비로소 신원이 완전히 확인된 것은 1993년이었다.[* 신원 확인 후 멩겔레의 유골은 상파울루 법의학 연구소에 보관되어 상파울루 대학교 의과대학의 법의학 과정에서 교육 보조 자료로 사용된다고 한다.] 이마저도 아들 롤프 멩겔레와 전처 이레네 쇤바인 측에서 DNA를 제공하기를 거부하여 1년가량 지연되었다.[* Ibid., p.190-191] 워낙 유명한 인물이어서 그의 죽음은 현재까지도 음모론의 소재가 되는 등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요제프 멩겔레를 비롯하여 생체실험에 참가했던 나치의 모든 의사들이 심리 검사를 했을 때 정상으로 나왔다. [[카를 게브하르트]], [[카를 브란트]]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나치 내에서는 정말로 엘리트이며 유능한 인재들이었고 가정에서는 자상한 남편이었으며 자기 아이들에게는 더 없이 다정한 아버지들이었다. 반면 그는 죽기 전까지 자신의 모든 범죄 혐의에 강력히 부인하며 자신은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고 증언하거나, 자신의 잔혹한 행각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